•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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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월명산 전망대 생각해 봅시다.
      군산 시민들은 시민 정신이 월명산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 시민이 많습니다.   월명산 북쪽으로는 아름다운 금강과 남쪽으로는 새만금의 중심 강인 만경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서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월명산은 시내 안쪽으로는 해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숲 속에는 벚나무와 동백나무가 어울어져 경관이 수렴하여 시민들에게 산책하기 좋은 도심 속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군산 출신인 작곡가 박판길 선생님의 가곡 "산노을"이 주는 인문 학적 배경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군산시는 아름다운 월명산에 20m의 전망대를 몇 년 전부터 준비하여 시행하고 있어 몇 가지를 주문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월명산 전망대가 21세기 군산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시와 차별성 있고 독창적이며 기억에 남는 형태로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문화와 역사와의 연계성이 시민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고 관광객들이 한 번 더 찾아올 수 있는 요소여야 합니다. 어디서 본 듯한 디자인으로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월명산의 부드러운 산세를 고려하여 전망대의 형태는 수직인 것보다는 월명산과 어울러지는 곡선적인 형태가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전망대 부지는 월명산 정상에 있으므로 높지 않아도 조망권이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높이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제일 아래층에는 시민들이 쉴 수 있는 휴게 공간과 군산의 역사관을 마련하여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군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필자가 제시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관 디자인 공모가 1차적으로 이루어진 후, 2차로 실시 설계가 진행되어 시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공감대가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 예로, 미국의 뉴욕의 Vessel 전망대가 2천6백억을 들여 벌집 모양으로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열었지만 현재는 문을 닫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실패한 결과입니다.   우리도 이러한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고 공개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전망대 계획 단계에서 외관 디자인과 설계가 공정에 90% 이상 차지하고 성공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군산의 월명산 수시탑이 55년 만에 새롭게 건립되는 전망대가 랜드마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욱 면밀히 검증하고 시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 상징적 랜드마크는 단순한 구조물이나 관광장소가 아닌 경제적 파급효과뿐만 아니라 군산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군산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추억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기고: 강용면 (조각가,설치미술가)
    • 새만금지역뉴스
    • 군산
    2023-12-14
  • 군산시의회 의장, 군산과 김제간 분쟁과 분열의 벽을 넘어 통합과 상생 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
    흔히들 하는 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다. 물건을 훔치려 남의 집에 들어간 도둑이 주인에게 들켜 이웃 사람들이 몰려드니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도둑을 잡아라”하며 피해자인 척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마치 새만금 관할권에 대한 이 모든 분란이 군산에서 비롯된 것처럼 적반하장을 부리고 있는 김제의 모양새다. 최근 김제는 시민을 모욕했다, 원색적인 언론보도를 일삼는다, 군산이 새만금을 독차지하겠다는 야욕의 이빨을 드러낸다는 등 연일 군산시의회 의장인 본 필자와 함께 군산을 맹비난하고 있다.   김제는 더 이상 군산 뒤에 숨어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가 종이 지자체라는 둥, 새만금 공동발전 절대 없다는 둥의 핑계를 대지 말고, 군산 때문에 못 한다는 새만금과 전북도의 공동발전, 상생대로의 방안을 명확히 제시해주길 바란다. 군산은 김제가 관할권에 대해 건건이 쟁송을 하는 행태를 멈추고 올바른 대안과 상호협력 방안을 적극 모색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던 군산이 왜 갑자기 올해 초부터 군산새만금신항 관할권에 대해 사생을 걸었을까? 지난해 12월 전라북도가 추진한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에서 김제가 새만금 관할권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 발단이다. 뜬금없는 ‘선 관할권, 후 행정구역’ 주장이 새만금을 공동과제로 한 3개 시·군 상생 방안에 찬물을 끼얹게 된 것이다.   이게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의 첫 단추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구성에 기대를 해왔던 군산은, 전라북도 내 다른 시군이 어떻게 되던 말던 내 땅이나 찾고 보자는 김제의 주도면밀한 계략에 무척이나 안일한 대응을 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뿐인가? 김제는 그동안 새만금 관할권에 대해서 법과 원칙에 따르자는 양머리를 내어놓고 뒤에서는 온갖 정치적 쟁점과 법적 분쟁으로 내세우는 등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보여왔다. 작년 지방선거 때도 김제는 모 시장 후보자 출마선언 과정에서 새만금 신항만을 김제로 귀속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올해 2월에는 새만금 신항의 정식명칭을 ‘김제항’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5분 자유발언이 나왔으며, 동서도로·만경7공구 등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야금야금 관할권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군산새만금신항 방파제 또한 당연히 군산시 관할인 것을, 김제의 어깃장에 해양수산부에서 관할권 결정을 신청 중이다.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쟁송을 제기하는 게 김제에서 말하는 법과 원칙에 따른 행정이라는 말인가? 당장 중분위 결정을 앞두고 있고 현재 군산시 행정구역인 군산새만금신항만은 물론 두리도, 비안도마저도 빼앗기게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군산시민을 우습게 보는 행태다. 과거 1·2호 방조제에 이어 또다시 역사적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아 시민들에게 실태를 알리고 함께 울분을 토로하며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자는 몸부림이 제정신이 아닌 행위이고 야망과 야욕을 드러내는 모습이라는 말인가?   더군다나 도가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 때마다 김제 서부지역과 현재의 군산지역이 고려시대 임피현에 포함된다며 김제와 군산은 역사적 뿌리가 같다며 동질성을 강조하는데 오히려 김제는 고군산군도가 만경현이었다며 새만금 관할권 주장을 하는, 이 아전인수격인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가만두고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새만금 역사의 한 자락에 서 있는 군산시의회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3·1만세 운동 때 항거한 것처럼, 우리 군산시민들은 새만금 관할권이 중심을 잃으면 안 된다고 전라북도에 외쳐대는 것이다. 이것이 군산시민으로서, 전라북도민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지방소멸위험 지수 분석 결과 전라북도 13개 시군이 ‘소멸위험 지역’, 이 중 7개 군은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전라북도가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군산새만금신항이 군산항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군산항은 사라지고, 전라북도 유일의 항구도시인 군산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전라북도 중추도시 중 하나인 군산이 소멸된다면 전라북도의 미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도에서도 나서야한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를 추진함에 앞서 각자도생격인 새만금 관할권 주장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고 공존공생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3개 시군 간 상생, 나아가 전북의 생존을 위해서는 분쟁과 분열을 제대로 봉합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한 후 통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전라북도가 새만금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경제도시로 나아갈 수 있다.   김제도 알고 있지 않은가? 2호 방조제, 새만금 동서도로 및 신항만이 새만금 개발의 핵심인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단지 면적만 따져 군산이 새만금을 다 차지하려 한다고 전라북도민마저 호도시키지 말길 바란다. 김제가 관할권에 더 이상 법적 쟁송을 제기하지 않고 새만금 김제·군산·부안 통합추진위원회 발족에 김제가 갈등을 조장하는 행위라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일이 없다면 군산시민은 전라북도 발전에 얼마든 협조할 각오가 되어 있다.   본 필자에 대한 비방을 가득 담은 김제시의회의 입장을 되새기니 김제가 이웃도시와 전라북도의 상생발전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의지를 고수하여 지금이라도 서로가 새만금에 대해 정치적 이해관계 및 법적 분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도가 중심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우리 군산시민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대승적 차원에서 전북의 백년대계를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서로 손을 맞잡아 희망과 기회의 땅, 새만금의 새 역사를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기에.   -본 내용은 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3-05-31
  • 리산고랭차(梨山高冷茶)
                      리산고랭차(梨山高冷茶) 1,000미터 이상의 높은 고도에서 자라는 차는 고산차(高山茶)라고 합니다. 고산차는 아리산산맥(阿里山山脈)、옥산산맥(玉山山脈)、설산산맥(雪山山脈)、중앙산맥(中央山脈), 대동산맥(台東山脈) 등의 고지대에서 재배되어 평지차보다 오염이 되지 않아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오룡차입니다. 유명한 고산차로는 아리산차(阿里山茶)、리산차(梨山茶), 대우령(大禹嶺), 삼림계(杉林溪), 옥산차(玉山茶), 설산오룡차(雪山烏龍茶)가 대표적입니다. 고산의 햇빛은 서늘하고 뜨겁지만 아침과 저녁으로는 안개가 끼어 평균 일조량은 작기 때문에 차엽의 쓰고 떫은맛은 약해지고 단맛이 돌고 우아한 향기가 생기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해발고도에 따라 1,000미터 이상에서 채엽 되는 고산차(高山茶)와 해발 1,500미터 이상에서 재배되는 고랭차(高冷茶)로 구분됩니다. 고랭차(高冷茶)는 고도가 높은 중앙산맥(中央山脈), 합환산맥(合歡山脈), 기래산맥(奇萊山脈) 주변에서 생산되는데 남투현(南投縣) 인애향(仁愛鄉)과 대중현(台中縣)의 고지대에서 주로 생산됩니다. 리산(梨山)은 1970년 이후부터 차(茶)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리산차산구(梨山茶產區)는 복수산농장(福壽山農場), 취봉(翠峰), 취산(翠巒), 무릉농장(武陵農場), 천부(天府), 송무(松茂), 홍향(紅香), 대설산(大雪山), 팔선산등지(八仙山等地: 대우령차구(大禹嶺茶區))를 포하하고 있으며 해발(海拔)은 1,200m에서 2,3000m 입니다. 포장지를 열어 찻잎을 보면 고랭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형태를 보면 둥글게 말린 구형(球型)으로 색상은 푸른 초록빛이 납니다.그리고 줄기 부분의 노란색이 선명 합니다. 탕색(湯色)은 황금색(黃金色)으로 맑고 깨끗합니다.향기(香氣)는 과향(果香)이 싱그럽고 달콤한 꽃향(花香)에 조화를 이루며 풍성한 맑은 청향(淸香)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결코 강하지 않고 밋밋하지도 않으며 은은한 향기가 일품 입니다.맛(味)은 목넘김에 거침이 없고 상쾌한 감칠맛과 깔끔한 단맛이 조화를 이룹니다. 마시고 난후 혀 밑에서 침이 고이며 깊은 향기가 목구멍으로 올라 오는 여운 오래 남습니다.
    • 오피니언
    • 수월스님의 茶 이야기
    2020-12-27
  • 차화석(茶化石)
              차화석(茶化石) 차화석(茶化石)은 숙차(熟茶)의 한 종류이며 보이차(普洱茶)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전통적 방식과 현대적 방식이 만나서 새롭게 탄생한 신개념의 보이차입니다.   차화석을 만드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노차두(老茶头)를 아셔야 합니다. 노차두는 보이차가 자연스럽게 타차(沱茶)처럼 변했다고 해서 자연타차(自然沱茶)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생김새를 보면 한 덩어리로 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엄지손톱 크기로 따로 뭉쳐져 있습니다.이것은 숙차를 악퇴발효(渥堆酵)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펙틴(pectin)때문에 산차(散茶)로 풀어지지 않고 덩어리로 남은 것입니다. 이 덩어리로 만들어진게 노차두입니다. 펙틴은 식물에 들어 있는 수용성 탄수화물이며, 식물의 열매에서 인접한 세포들의 세포벽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도록 해주는 역활을 합니다. 그래서 노차두는 찻잎을 서로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게 되는 겁니다.펙틴이 서로 단단하게 연결시켜 주는 시멘트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펙틴은 물에 닿으면 완전히 녹는 단당류로 분해가 됩니다. 그 효능이 놀라운데, 우선, 장을 청소해주고 대장암을 예방하는데 탁월하다고 합니다.몸속에서 곧바로 소화되지 않고 나중에 변을 부풀리는 역활을 하여 변을 배출 시키게 하여 변비를 예방 합니다.또한, 콜레스트롤의 수치를 낮춰주는 효능이 있고 다이어트와 당뇨, 고혈압에 좋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방사능 물질인 세슘을 몸밖으로 배출 시키는 연구 결과가 나와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노차두를 파쇄해서 다시 특수한 방법으로 만들어 일정한 크기로 긴압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게 차화석 입니다.차화석은 잡미와 잡향이 거의 없고 깔끔합니다.마치 보이차고를 연상시킵니다. 맛(味)은 강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단맛이 은은하게 납니다. 연하게 우리거나 진하게 우려도 거부감이 거의 없습니다.   제품 특성상 긴압을 강하게 했기 때문에 평소 보다 우리는 시간을 길게 잡아야합니다.그리고 끓여서 마시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수분 공급을 차화석으로 하실때에는 조금 연하게 끓여서 마시면 효능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차를 끓일때는 먼저 물과 차의 양은 딱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비율은 10 대 2에서 12 대 2 내외가 좋습니다.물이 끓기 시작하면 차화석을 넣고 끓이는 시간은 너무 오래 하면 차가 탁해져 마시기에 거부감이 있습니다.보통 2분 내외가 적당합니다. 이것 또한 정해진 것은 없으며 본인의 취향에 맞게 하시면 됩니다.   엽저를 보면 아무리 우려도 좀처럼 엽저(葉底)가 풀어지지 않습니다. 우린 난 후 엽저를 그냥 버리지 마시고 모아서 주전자에 넣고 팔팔 끓여서 마시거나 세안을 하면 피부에 좋습니다.
    • 오피니언
    • 수월스님의 茶 이야기
    2020-09-19
  • 김관영 의원은 고군산군도(장자도.선유도.무녀도.신시도.야미도)다녀왔다.
    김관영 의원은 고군산군도(장자도.선유도.무녀도.신시도.야미도)다녀왔다. 어촌 뉴딜 300 사업의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고충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신시도 자연휴양림등 주요 관광사업을 잘챙겨 전국 최고관광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 지역인물동정
    • 군산 인물동정
    2020-03-06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노산녹차(崂山綠茶)
                            노산녹차(崂山綠茶) 산동성(山東省) 청도(靑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산(崂山)이 있습니다. 노산은 중국을 대표하는 해안가 명산으로 현지인들도 오고 싶어하는 국가등급 AAAAA의 노산구노산국가산림공원(崂山区崂山国家森林公园 / Laoshan National Forest Park,Laoshan)입니다. 노산은 도교(道敎) 및 청도맥주(青岛啤酒)와 관련이 있는데 도교의 발생지로 산 곳곳에서 관련 조각상과 무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시사철이 아름답고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청도맥주의 수원지(水源地)가 바로 이곳 노산입니다. 노산은 "해상 제일의 명산"으로, "신선이 사는 명산", "도교 천하 제2의 밀림"이라는 명승지입니다.독특한 지리적 환경과 비옥한 토지, 우량품질의 수원에서 생산된 노산녹차는 빛깔(色)과 향(香), 맛(味) 모든 것이 우수해서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현대에 와서 남방(南方)쪽의 녹차를 들여와 대량 재배하면서 노산녹차가 유명해졌지만, 노산차의 역사는 원래 도교 도사들이 직접 재배하여 차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녹차의 원산지였던 남방지역은 이제 기온이 너무 높고 일교차가 커서 녹차의 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조건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생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노산이 녹차 재배에 적지로 각광받으며, 최고품질의 녹차를 생산하고 있습니다.노산녹차는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찻잎을 주요 원료로 하여 100℃저온에서 3번 말리기를 하여 차 원래의 맑은 향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찻잎의 모양은 동그란 구슬과 같고 차를 우리면 탕색은 파래집니다.맛이 부드럽고 단맛이 돌며 잔잔한 과일향이 납니다. 노산녹차는 노산광천수, 노산의 겨울과 함께 "노산의 3색(崂山三色)" 이라 불리웁니다.                      
    • 오피니언
    • 수월스님의 茶 이야기
    2020-04-24
  • 김기창 화백 '예수의 생애' 구암동에서 완성
                                                           수태 고지                                                         예수탄생                                                       세례받음                                                       제자들을 부름                                                       간음한 여인                                                       물위를 걷다                                                        오천명을 먹임                                                       막달레나 예수의 발을 씻김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                                                        최후의 만찬                                                       빌라도에게 재판을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 못박힘                                                         예수님 운구                                                        부활 승천   운보 김기창 화백과 성화 〈예수의 생애〉     군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최규홍   운보 김기창(1913-2001)은 서울 운니동에서 출생했다. 승동보통학교에 입학 등교 첫 날 열린 대운동회때 장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인해 후천성 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졸업후 어머니 한윤명의 권유로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서 미술수업을 시작했다. 1931년(18세)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로 첫 입선, 어머니는 아호를 운포(雲圃)라 지어주었다. 그는 광복과 함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아호 운포(雲圃)의 구(口)를 없애고 운보(雲甫)로 바꾸었다. 19세에 〈수조(水鳥)〉로 제11회 선전에 입선했으나 어머니가 급서(향년 38세)했다. 여일(麗日)로 제19회 선전 특선, 연 4회 특선으로 선전 규정에 의해 27세에 추천작가가 되었다.   부인 우향 박래향은 1920년 4월 13일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6세때 부모를 따라 전북 군산으로 이주했다. 군산공립보통학교,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 사범대에 입학했고, 그 다음해에 인물화에 능한 동양화가 에구치(江口敬郞)를 만나서 수채화와 동양화에 대해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1944년 도쿄여자미술대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한 우향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최고상 '창덕궁상', 1956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노점’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여류작가로서는 최정상의 위치를 점했다.   운보는 1943년(33세)에 우향과 첫 만남을 가졌고, 1948년 1월 27일 개관을 준비하고 있던 중구 예장동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947년 12월 17일 우향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관장이던 송석하의 주례로 신식과 구식이 어우러진 형식을 취했다.    운보는 친구 이강수에게, 우향은 이모에게 병풍 한 벌씩을 갖다 주고 비용을 마련했다. 우향 모친은 완강한 반대를 했고 부친은 병으로 참석치 못했다.   자유신문(1947.12.13.자)은 “〈김기창 화백 결혼〉-우리 화단의 중진인 김기창 화백은 오는 17일 오후 1시 민속박물관내에서 송석하 씨 주례로 여류화가 박래현 양과 화촉의 성곡(盛曲)을 거행하다.”라고 보도했다.    1947년 결혼 당시 우향과의 약속 중 하나였던 부부전을 개최키로 하고 한국 최초의 부부전인 〈운보-우향부부전〉을 개최,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성격의 개성적 경향에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1950년 6월 22일 제4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 중 3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 작품을 분실하게 되었다. 피난을 가지 못해 공산 치하에서 3개월을 보냈다. 장애자라는 이유로 납북은 모면하게 되었으나 여동생 기옥(基玉), 남동생 기만(基萬)이 납북되고 말았다.   운보는 당시 전시회에 심혈을 기울였던 터라 경제적 여력이 없게 되어 1950년 처가가 있는 군산 시외의 농촌 구암동으로 내려와 농장 한 모퉁이의 토방에 살게 되었다.   운보는 피난생활의 생활고로 미군부대의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김종래의 소개로 초상화를 그려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평소 우향을 통해 친분이 있던 미군정 당시 서울시장을 지낸 바 있는 김형민이 부산에 있으면서 지원해 주어서 10여 점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그림을 판 돈으로 구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일본에서 회견과 안료, 붓, 먹 등을 조달하여 미군부대의 초상화 그리는 생활을 중단하고 다시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 때 김형민이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찍어둔 사진 30여 장을 제공하여 운보가 이를 참조하여 풍속화를 재현하기도 하였다.   2015년에 발행된 〈운보 김기창 성화집〉에 따르면 운보는 1952년 1여 년에 걸쳐 〈예수의 생애〉 제작에 착수했다. 1년 동안 수태고지. 아기예수의 탄생, 동방박사의 경배 등 29점의 예수의 일대기 완성에 몰두했다. 1953년 독일 선교사의 제의로 〈부활〉을 추가로 제작하여 〈예수의 생애〉 총 30점을 완성했다.   1953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구암동 시절 그린 성화 30점, 입체파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제5회 운보-우향부부전을 10여 일간 개최하여 성화를 보려는 서울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매일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운보는 1978년에 발행된 ‘나의 심혼(心魂)을 바친 갓 쓴 예수의 일대기’ 성화집 〈예수의 생애〉를 출간하고 기념으로 경미화랑에서 〈예수의 생애〉 시리즈를 전시하며 다음과 같이 심경을 밝혔다.   “그것은 마음 괴로운 순간이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었다.    이 무렵 나는 예수의 행적을 더듬는 성화를 그리고 있었다. 때는 6.25 전쟁의 가열로 온 민족이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냈던 1952년 전북 군산의 피난처였다.   나는 처가에서 나의 고통스런 생활을 화필로 달래며 어서 이 땅에서 전쟁이 끝나고 통일된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다.    그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갖기 위해 한 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한편 운보 역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친일행적을 엿볼 수 있다. 1993년 7월 2일자 한겨레신문은 「원로 동양화가인 운보 김기창(80) 화백은 1일 외아들 김완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과 관련해 “일제 말에 친일을 한 사실이 있으며 이에 대해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한다”고 밝혔다.    김완은 이날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기자회견을 갖고 친일행위를 회개하는 뜻에서 오는 10월 5권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작도록에 친일작품인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총후병사’ 등을 수록하는 한편 과거에 대한 고해성사 형식의 글도 실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친일 논란을 불러 일으킨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1943년 1월 29일부터 9일까지 매일신보에 친일 시와 함께 실린 7점의 삽화 가운데 하나다.」 라고 보도했다.   그 역시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조선총독부 전시체제와 문예정책에 협조했던 오점이 있었다. 친일미술가조직 구신회에 참여하거나(1941), 조선남화연맹 전시회(1942), 반도총후미술전람회(1942,1943), 결전미술전람회(1944) 등 일본화 부문에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출품했다. 매일신보에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의 삽화를 그리는 등 친일행위에 적극 가담했다.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을 계기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발간위원회’가 작품 4천여점으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전5권)을 발간했다. 전작도록이 발간된 것은 그가 국내 최초라고 한다.   1995년 8월(81세) 운보는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의 막내 동생 기만과 형제전을 관훈동 도올아트타운 신관에서 열었다. 15년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 기만은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으로 가 평양예술대를 졸업했으며 공훈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말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는 월북했던 동생 기만을 극적으로 만나 가슴 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2001년 1월 23일 운보는 숙환으로 운명하여 청주 운보의 집에 우향과 합장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들 완(完), 딸 현(玄), 선(璇), 수녀가 된 영(瑛 )등 1남 3녀다. 북한에는 여동생 기옥(基玉, 의사), 남동생 기만(基萬, 공훈화가)이 있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막내딸 영을 잉태했을 때 영감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1957년작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기증했다.   구암동 390번지의 구 토지대장에서 1952년 10월에 운보 자신의 명의로 소유권 이전 등기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운보가 그의 처 우향, 아들 완, 큰딸 현을 이끌고 군산에 피난 와 구암동 390번지의 대지(대지 251㎡)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했던 흔적이다.   현재 운보 가족이 살았던 구암동 390번지는 건물은 사라지고 빈 터로 남아 있다. 70여 년전 운보가 이곳의 헛간을 작업실로 개조해 30여점의 성화를 그렸던 향토사적으로 스토리텔링이 있는 곳이다. 개발에 밀려 운보와 우향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문화 골목’을 보존하고 〈작은 영상 미술관〉을 조성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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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규홍 교수의 향토사
    2020-04-23
  • [데스크칼럼 / 허종진 편집국장 ] 3,500억원 투입 새만금동서2축도로 연결도로 없어 놀릴 판
    새만금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동맥이 될 동서2축도로가 오는 6월 완공을 앞두고 있지만 김제시 구간에서 연결도로가 오는 2024년에야 완공예정이어서 3500여억원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도로가 사실상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니 정말 어이가 없을 뿐이다.   게다가 새만금개발청에서는 새만금 권역 밖이어서 자신들의 관할 구역이 아니라고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해당 지자체인 김제시는 전주~경북 포항간 고속도로 구간이 완공되면 무용지물이 될 임시도로를 개설하는데 난색을 표명하는 등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양새이다.   이 도로는 전체 연장 20.4km로 (새만금청 소관 16.473km 농식품부 소관 3.95km)로 새만금 방조제에서 김제시 진봉면 까지 새만금을 동서로 가로질러 전주~경북 포항으로 연결된다.   지난 2015년 7월 28일 새만금 현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총사업비 3,480억 원으로 1공구는 6.5km는 GS건설에서 시공하고 있으며, 2공구 9.973km는 롯데건설에서 시공 중에 있으며 두 달 후에는 도로가 완성될 전망이다.   김제시 심포항 인근 3.95km는 한국농어촌공사에서 발주하여 역시 6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이 동서2축도로가 완공되면 새만금 지역의 접근성 향상으로 내부 개발에 소요되는 조성비용 절감은 물론 내부 개발 역시 한층 더 가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도로는 새만금신항만을 출발해 김제, 전주를 거쳐 경북 포항으로 연결되는 국토를 동서로 연결,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과의 교류를 위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현재 동서2축도로와 연결되는 전주~ 포항간 도로 55.1㎞는 한국도로공사에서 발주해 1조9,709억원을 투입해 시공 중이지만, 2024년 12월 완공예정이어서 3,480억원이 투입된 새만금동서2축도로는 이 도로와 연결되기 까지 몇 년 동안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될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동서2축도로를 조기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임시 연결도로를 시급히 개설해야 함에도 불구, 이 도로 발주청인 새만금개발청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관계기관과 지자체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벌어짐에 따라 결국 수천억이 투입된 도로를 완공하고도 국민들은 활용하기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발생을 앞두고 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새만금개발청에서는 또 동서2축도로 완공을 불과 2개월여 앞두고 있는데도 한국도로공사, 해당 지자체, 경찰관계자 등이 참여하여 결정해야할 도로표지판 계획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공사발주와 관리에 미숙함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새만금개발을 주관하는 새만금개발청에서는 수천억~수조원의 예산이 수시로 투입되어 시행되는 새만금 내부 개발사업들에 좀더 꼼꼼한 계획과 실행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잘 해야되지 않을까.                                                                                                                                      허 종 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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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칼럼
    2020-04-21
  • 운남대엽종(云南大叶种)
                    중국(中國)에서 2008년도에 중화인민공화국국가표준(中华人民共和国国家标准)를 발표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운남대엽종(云南大叶种)에 대한 정의는 '운남대엽종차(Yumnan Daye tea)는 운남성 차구에 분포하는 각종 교목형, 소교목형 대엽종 차나무 품종의 총칭'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대엽종은 찻잎이 크게 자라는 품종입니다.   여기에는 정확한 기준이 있는데, 바로 찻잎의 면적입니다.찻잎의 면적에 따라서 소엽종(小叶种), 중엽종(中叶种), 대엽종(大叶种), 특대엽종(特大叶种)으로 나누어 집니다. 다음은 면적을 계산하는 방법입니다.잎의 길이 × 잎의 넓이 × 0.7를 해서 나온 값에 따라 여러 품종으로 나누어지는 겁니다.소엽종은 1에서 14, 중엽종은 15 에서 27, 대엽종은 28에서 50, 특대엽종은 50 이상입니다. 운남에서는 대엽종만 자라는게 아니라 소엽종, 중엽종, 대엽종, 특대엽종 이렇게 네가지 모두 자랍니다.운남대엽종의 대표적인 품종으로는 봉경종(凤庆种), 맹고종(勐库种), 맹해종(勐海种)이며 자연교잡(自然交雜)을 통해 씨앗으로 번식하였습니다. 첫번째, 봉경종은 임창시 봉경현(临沧市凤庆县)을 중심으로 영덕(永德), 진강(镇康), 임창(临沧), 창녕(昌宁), 보산(保山), 등충(腾冲), 용릉(龙陵), 덕굉(德宏)등에 주로 분포하며 1980년대 후반에 운남 각지로 옮겨 졌습니다. 두번째, 맹고종은 임창시 쌍강현(临沧市双江县)를 중심으로 임창(临沧), 창원(沧源), 경마(耿马), 난창(澜沧), 묵강(墨江), 맹련(孟连), 서몽(西蒙), 경곡(景谷), 경동(景东), 진원(镇源) 등에 주로 분포하며 1980년대 후반에 운남 각지로 옮겨 졌습니다. 세번째, 맹해종은 서쌍판납 맹해현(西双版纳勐海县)을 중심으로 사모시(思茅市)에 분포하고 있습니다.1980년대 중후반에는 운남의 동남과 중앙 지역으로 옮겨 졌습니다. 그외 오랫 동안 연구 개발한 품종으로는 운항10호(云抗10号), 운항14호(云抗14号), 운항27호(云抗27号), 원항37호(云抗37号), 운항43호(云抗43号), 원선9호(云选9号), 운매(云瑰), 불향1호(佛香1号), 불향2호(佛香2号), 장엽백호(长叶白毫)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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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월스님의 茶 이야기
    2020-04-18
  • 보이차의 포장(包裝)
                    보이차(普洱茶) 중에서 병차(餠茶)의 포장(包裝)은 전통적으로 대나무 껍질로 되어있는데, 이 것을 죽각포장(竹殼包裝)이라고 합니다. 죽각포장 하나에 보이차 7편을 넣었고 그 단위를 통(筒)이라고 합니다.죽각포장을 풀면 맨위의 차 병면에 한장의 종이가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내표(內票)라고 하며 보이차의 이력과 정보가 적혀져 있습니다. 1편 마다 작은 종이가 차의 병면에 묻혀져 있는 것을 내비(內飛)라고 합니다. 내비에는 차의 이력과 정보가 간략하게 정리 된것도 있지만, 대개 상호가 인쇄되어 있습니다.정리하면 1통에는 내표 1장과 내비 7장이 들어 있습니다. 그 당시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요즘 처럼 1편마다 종이 포장을 안하고 무지(無紙)의 형태가 되었습니다.지금은 1편마다 종이 포장으로 안에 내표와 내비가 같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불어 포장지 뒤편에 생산년도, 원료, 중량, 생산지, 차창등 자세한 내용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보이차(병차)의 포장 단위는 1편(片), 7편을 넣어 죽각포장(竹殼包裝)되어 1통(筒), 12통(84편)이 모여 지(支)이며보통 건(件)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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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월스님의 茶 이야기
    2020-04-17
  • 차의 비타민(Vitamin)과 아미노산(amino acid)
                      차의 비타민(Vitamin)과 아미노산(amino acid) 1. 비타민(Vitamin)찻잎이 함유한 비타민은 비타민 A, B1, B2, C, E와 니코틴산 등이 매우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는데 특히 비타민 C와 토코페롤, 비타민 A, B 군이 다른 식물에 비해 월등히 높습니다.일반적인 비타민 C는 열에 약하지만 차에 들어있는 비타민 C는 열에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특히, 차에는 비타민 C가 레몬에 비해 5배 이상 함유되어 있어 일찍부터 괴혈병 치료제로 이용되어 왔습니다.비타민 A는 야맹증이나 안구건조증에 효과가 있고 섭취하려면 잎차보다 분말차가 더 좋으며 많이 섭취할 수 있습니다.2. 아미노산(amino acid)아미노산은 차의 감칠맛을 내는 성분으로 카페인의 쓴 맛, 카테킨의 떫은 맛과 더불어 차의 맛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찻잎 중의 아미노산은 약 28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가장 중요한 성분은 데아닌(Theanine)이라고 하는 아미노산입니다.전체 아미노산의 54%이상을 차지하는 데아닌은 감칠맛을 낼 뿐 아니라 카페인의 활성을 억제하는 작용을 합니다.햇빛을 차단시키면 아미노산이 카테킨으로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잎에 남아 있게 되므로 감칠맛이 뛰어나고 떫은맛이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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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월스님의 茶 이야기
    2020-04-13
  • 전홍대금침(滇红大金针)
                        운남을 대표하는 한자인 전(滇)자를 붙여 전홍홍차(滇紅紅茶), 그냥 줄여서 전홍(滇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홍(滇紅)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중국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中日戰爭)입니다. 서양에 중국의 홍차(紅茶)가 소개 되면서 외국으로 수출 되는 홍차는 소종홍차(小種紅茶)로 소나무 향이 배여 있는 복건성(福建省)의 무이산(武夷山)에서 많이 생산되는 정산소종(正山小種)이 대표적이며, 또 다른 홍차는 기문홍차(祁門紅茶)입니다. 그런데 이런 홍차들의 생산지는 중국의 동남쪽에 위치 하였는 데, 그 곳은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지역이었습니다. 당연히 홍차의 생산이 어려워졌고 서남쪽 지역의 찾다가 1939년 현재의 임창(臨倉)의 봉경(鳳慶)에 터를 잡고 그 당시 순녕차창(順寧茶厂), 지금의 봉경차창(鳳慶茶厂)이 건립됩니다. 이 때 부터 전홍이 본격적으로 생산 되기 시작합니다.전홍은 다른 홍차들에 비해 역사가 상당히 짧지만, 그에 비해 인기와 명성은 대단히 높습니다. 정식으로 등록된 지역을 보면, 임창(臨滄), 보산(保山), 덕굉(德宏), 대리(大理) 등의 4개 주(州) 지역 일대를 포함하여보산(保山), 서쌍판납(西双版納), 맹해(勐海), 곤명(昆明)등이 있습니다. 운남성(云南省) 전체 차밭 면적의 약 52%를 차지하며, 차엽 생산량은 운남성 전체의 약 6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그 중에서도 봉경(鳳慶), 운현(雲縣), 쌍강(双江), 창녕(昌寧) 등의 현(縣) 단위의 지역에서 전홍 약 90% 이상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전홍은 원료가 되는 모차(毛茶)에 따라 나누어집니다.먼저, 금아(金芽)가 발효된 금호(金毫)가 고불고불 소라(海螺)처럼 말려있다고 해서 금라홍(金螺红) 입니다.금아를 쪽쪽 펴서 만든 금사홍(金丝紅), 그리고 찻잎을 우렸을 때 한송이 꽃처럼 펴지게끔 만든 공예홍차(工藝紅茶)가 있습니다. 금사홍 중에서도 찻잎이 가장 튼실하고 큰것으로 만든것을 전홍대금침(滇红大金针)이라고 합니다. 전홍 중에서도 색(色), 향(香), 미(味)가 제일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다른 종류의 전홍 보다 근래에 만들어졌으며 봉경(鳳慶)에서 많이 생산 됩니다. 원료 튼실한 일아일엽( 一芽一叶)으로 싹의 끝을 잘 다듬어 만들어집니다.1년에 세번 수확 하는데 계절에 따른 품질은 봄차(春茶)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이 가을차(秋茶), 여름차(夏茶) 입니다. 전홍대금차의 외형은 바늘 처럼 곧게 펴져 있고 황금빛이 선명 합니다.향기(香氣)는 달콤한 밀향(蜜香)이 높고 풍성하며오래 지속 됩니다.맛(味)은 은은한 단맛이 상쾌하게 입안 가득 펴집니다. 내포성도 아주 좋고 엽저(葉底)는 어린 싹으로 이루어져 백호은침(白毫銀針)을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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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월스님의 茶 이야기
    20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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