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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창 화백 '예수의 생애' 구암동에서 완성
                                                           수태 고지                                                         예수탄생                                                       세례받음                                                       제자들을 부름                                                       간음한 여인                                                       물위를 걷다                                                        오천명을 먹임                                                       막달레나 예수의 발을 씻김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                                                        최후의 만찬                                                       빌라도에게 재판을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 못박힘                                                         예수님 운구                                                        부활 승천   운보 김기창 화백과 성화 〈예수의 생애〉     군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최규홍   운보 김기창(1913-2001)은 서울 운니동에서 출생했다. 승동보통학교에 입학 등교 첫 날 열린 대운동회때 장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인해 후천성 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졸업후 어머니 한윤명의 권유로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서 미술수업을 시작했다. 1931년(18세)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로 첫 입선, 어머니는 아호를 운포(雲圃)라 지어주었다. 그는 광복과 함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아호 운포(雲圃)의 구(口)를 없애고 운보(雲甫)로 바꾸었다. 19세에 〈수조(水鳥)〉로 제11회 선전에 입선했으나 어머니가 급서(향년 38세)했다. 여일(麗日)로 제19회 선전 특선, 연 4회 특선으로 선전 규정에 의해 27세에 추천작가가 되었다.   부인 우향 박래향은 1920년 4월 13일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6세때 부모를 따라 전북 군산으로 이주했다. 군산공립보통학교,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 사범대에 입학했고, 그 다음해에 인물화에 능한 동양화가 에구치(江口敬郞)를 만나서 수채화와 동양화에 대해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1944년 도쿄여자미술대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한 우향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최고상 '창덕궁상', 1956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노점’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여류작가로서는 최정상의 위치를 점했다.   운보는 1943년(33세)에 우향과 첫 만남을 가졌고, 1948년 1월 27일 개관을 준비하고 있던 중구 예장동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947년 12월 17일 우향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관장이던 송석하의 주례로 신식과 구식이 어우러진 형식을 취했다.    운보는 친구 이강수에게, 우향은 이모에게 병풍 한 벌씩을 갖다 주고 비용을 마련했다. 우향 모친은 완강한 반대를 했고 부친은 병으로 참석치 못했다.   자유신문(1947.12.13.자)은 “〈김기창 화백 결혼〉-우리 화단의 중진인 김기창 화백은 오는 17일 오후 1시 민속박물관내에서 송석하 씨 주례로 여류화가 박래현 양과 화촉의 성곡(盛曲)을 거행하다.”라고 보도했다.    1947년 결혼 당시 우향과의 약속 중 하나였던 부부전을 개최키로 하고 한국 최초의 부부전인 〈운보-우향부부전〉을 개최,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성격의 개성적 경향에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1950년 6월 22일 제4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 중 3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 작품을 분실하게 되었다. 피난을 가지 못해 공산 치하에서 3개월을 보냈다. 장애자라는 이유로 납북은 모면하게 되었으나 여동생 기옥(基玉), 남동생 기만(基萬)이 납북되고 말았다.   운보는 당시 전시회에 심혈을 기울였던 터라 경제적 여력이 없게 되어 1950년 처가가 있는 군산 시외의 농촌 구암동으로 내려와 농장 한 모퉁이의 토방에 살게 되었다.   운보는 피난생활의 생활고로 미군부대의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김종래의 소개로 초상화를 그려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평소 우향을 통해 친분이 있던 미군정 당시 서울시장을 지낸 바 있는 김형민이 부산에 있으면서 지원해 주어서 10여 점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그림을 판 돈으로 구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일본에서 회견과 안료, 붓, 먹 등을 조달하여 미군부대의 초상화 그리는 생활을 중단하고 다시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 때 김형민이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찍어둔 사진 30여 장을 제공하여 운보가 이를 참조하여 풍속화를 재현하기도 하였다.   2015년에 발행된 〈운보 김기창 성화집〉에 따르면 운보는 1952년 1여 년에 걸쳐 〈예수의 생애〉 제작에 착수했다. 1년 동안 수태고지. 아기예수의 탄생, 동방박사의 경배 등 29점의 예수의 일대기 완성에 몰두했다. 1953년 독일 선교사의 제의로 〈부활〉을 추가로 제작하여 〈예수의 생애〉 총 30점을 완성했다.   1953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구암동 시절 그린 성화 30점, 입체파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제5회 운보-우향부부전을 10여 일간 개최하여 성화를 보려는 서울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매일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운보는 1978년에 발행된 ‘나의 심혼(心魂)을 바친 갓 쓴 예수의 일대기’ 성화집 〈예수의 생애〉를 출간하고 기념으로 경미화랑에서 〈예수의 생애〉 시리즈를 전시하며 다음과 같이 심경을 밝혔다.   “그것은 마음 괴로운 순간이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었다.    이 무렵 나는 예수의 행적을 더듬는 성화를 그리고 있었다. 때는 6.25 전쟁의 가열로 온 민족이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냈던 1952년 전북 군산의 피난처였다.   나는 처가에서 나의 고통스런 생활을 화필로 달래며 어서 이 땅에서 전쟁이 끝나고 통일된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다.    그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갖기 위해 한 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한편 운보 역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친일행적을 엿볼 수 있다. 1993년 7월 2일자 한겨레신문은 「원로 동양화가인 운보 김기창(80) 화백은 1일 외아들 김완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과 관련해 “일제 말에 친일을 한 사실이 있으며 이에 대해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한다”고 밝혔다.    김완은 이날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기자회견을 갖고 친일행위를 회개하는 뜻에서 오는 10월 5권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작도록에 친일작품인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총후병사’ 등을 수록하는 한편 과거에 대한 고해성사 형식의 글도 실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친일 논란을 불러 일으킨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1943년 1월 29일부터 9일까지 매일신보에 친일 시와 함께 실린 7점의 삽화 가운데 하나다.」 라고 보도했다.   그 역시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조선총독부 전시체제와 문예정책에 협조했던 오점이 있었다. 친일미술가조직 구신회에 참여하거나(1941), 조선남화연맹 전시회(1942), 반도총후미술전람회(1942,1943), 결전미술전람회(1944) 등 일본화 부문에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출품했다. 매일신보에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의 삽화를 그리는 등 친일행위에 적극 가담했다.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을 계기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발간위원회’가 작품 4천여점으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전5권)을 발간했다. 전작도록이 발간된 것은 그가 국내 최초라고 한다.   1995년 8월(81세) 운보는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의 막내 동생 기만과 형제전을 관훈동 도올아트타운 신관에서 열었다. 15년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 기만은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으로 가 평양예술대를 졸업했으며 공훈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말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는 월북했던 동생 기만을 극적으로 만나 가슴 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2001년 1월 23일 운보는 숙환으로 운명하여 청주 운보의 집에 우향과 합장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들 완(完), 딸 현(玄), 선(璇), 수녀가 된 영(瑛 )등 1남 3녀다. 북한에는 여동생 기옥(基玉, 의사), 남동생 기만(基萬, 공훈화가)이 있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막내딸 영을 잉태했을 때 영감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1957년작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기증했다.   구암동 390번지의 구 토지대장에서 1952년 10월에 운보 자신의 명의로 소유권 이전 등기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운보가 그의 처 우향, 아들 완, 큰딸 현을 이끌고 군산에 피난 와 구암동 390번지의 대지(대지 251㎡)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했던 흔적이다.   현재 운보 가족이 살았던 구암동 390번지는 건물은 사라지고 빈 터로 남아 있다. 70여 년전 운보가 이곳의 헛간을 작업실로 개조해 30여점의 성화를 그렸던 향토사적으로 스토리텔링이 있는 곳이다. 개발에 밀려 운보와 우향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문화 골목’을 보존하고 〈작은 영상 미술관〉을 조성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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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규홍 교수의 향토사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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