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는 전북에서 오고, 송전탑은 전북에 선다
전북 동부권을 둘러싼 송전탑 갈등은 더 이상 개별 지역의 민원 문제가 아니다.
이는 수도권 산업 집중과 장거리 송전에 의존해온 국가 전력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이며, 그 실체는 345kV 초고압 송전망 지도 한 장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난 2025년 12월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K-반도체 육성전략 보고회. 이재명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문제를 언급하며 이례적으로 직설적인 우려를 표했다.
대통령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계획대로 조성될 경우 16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며, 이는 원전 10기 이상에 해당하는 규모”라며, “600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는 바람직하지만 수도권 집중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전력을 외부에서 끌어오기 위해 충남·전북 등 중간 지역을 관통하는 송전망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민 반발과 사회적 갈등을 직접 언급하며, 장거리 송전 구조의 한계를 분명히 짚었다.
이어 “앞으로는 송전 비용을 전기요금에 부담하는 구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송전거리 비례요금제, 즉 지산지소(地産地消) 원칙은 불가피한 정부 방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전력 요금 문제가 아니라, 산업 입지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정책적 신호로 해석된다.
보고회에서 공개된 수치는 수도권 산업 집중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입주 예정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모두 필요한 전력량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삼성전자는 필요 전력 9GW 중 약 6GW만 확보했고, SK하이닉스 역시 6GW 중 약 3GW만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확보된 6GW의 공급 방안은 여전히 백지 상태다.
이는 단순한 전력 부족 문제가 아니라, 수도권에 초대형 전력 다소비 산업을 계속 집적시키는 방식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345kV 송전망 지도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지도에는 서남해안과 호남권에서 생산된 전력이 군산·새만금 일대를 거쳐 전북 내륙과 동부권을 관통한 뒤, 충청을 지나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굵은 송전선들이 촘촘히 표시돼 있다.
이 선로들이 지나가는 지역은 대부분 산림과 농촌, 주거 밀집 지역이다. 송전선 하나를 설치하기 위해 산 정상부를 따라 대규모 벌목이 이뤄지고, 수십 미터 폭의 산림 훼손과 농지 단절, 전자파 우려, 경관 훼손이 뒤따른다.
송전탑 하나는 단순한 철 구조물이 아니라, 장기적인 주민 갈등과 지역 공동체의 분열을 동반하는 사회적 구조물이다.
지도는 말없이 질문을 던진다. “왜 전기는 전북에서 생산되는데, 전북에서는 쓰이지 않는가.”
전북은 이미 대한민국 전력 생산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생산된 전기는 지역 산업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수도권으로 이동하고, 전북에는 송전탑과 갈등만 남는 구조가 반복돼 왔다.
전북 동부권에서 벌어지는 송전탑 논란은 ‘또 하나의 송전선’이 아니라, 이 구조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다.
전북발전연합회 최한양 회장은 “전북은 전기를 생산하지만 산업과 일자리는 수도권으로 이동하고, 전북에는 송전탑만 남는다”며 “이 구조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해법은 ‘송전선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송전탑 갈등의 해법이 보상 확대나 주민 설득에 있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해법은 단 하나, 전력 다소비 산업의 입지를 바꾸는 것이다. 즉, 전기를 끌어오는 시대에서 전기를 따라 산업이 이동하는 시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새만금이 다시 주목받는다. 새만금은 이미 육상 태양광 300MW가 가동 중이고 해상풍력을 포함해 총 7GW 규모의 재생에너지 개발이 계획돼 있으며 대규모 산업용지를 동시에 확보한 드문 공간이다.
이는 곧 송전선을 늘리지 않고도 산업을 수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입지라는 의미다. 새만금 RE100 산업단지는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를 일치시키는 지산지소 모델이자, 송전탑 갈등을 구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현실적 해법으로 평가된다.
전북 동부권 송전탑 문제는 “어디에 송전탑을 세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공장을 세울 것인가”의 문제다.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가 전국의 송전선 위에 서 있을 것인지, 아니면 새만금과 같은 재생에너지 거점으로 산업이 이동할 것인지. 345kV 송전망 지도는 이미 답을 보여주고 있다.
전북도민과 정치권의 단합된 역량이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