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30(수)
 

임피 봉암서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서울에 성균관을그 하급 관학인 향교(鄕校)를 전국 각지에 설치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의 향교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향반(鄕班문중의 사학인 서원(書院)이 등장한다.

향교는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이름만 남게 되었고 단지 문묘를 행사하는 기능만 갖게 되었다.

향교에서 춘추로 모시는 우리나라 동국18현은 신라 2현으로 설총최치원고려 2현으로 안유정몽주조선 14현으로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김장생의 아들), 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이다. 

군산지역에는 태종 3(1403) 옥구향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6)와 임피향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5)가 세워졌다.

조선 중기에는 오늘날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서원(書院)이 지방 유림(儒林)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개원되었다.

서원은 배향과 교육기능을 담당하였다성현들에게 제사 지내고인재를 키우기 위해 세웠다성현들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과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서재를 아울러 갖추었다.

봉암서원은 군산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이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봉암서원                           죽봉시문집 발간 영모재(임피면 월하리 상갈)

 


 1660(현종원년임피 현령 정시창을 중심으로 조산두고만구고만오장후준 등에 의해 창건되었고 

1664년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 1574-1656)이 배향되고 1666년에 자암(自庵김구(金絿, 1488-1534)가 배향되었다.

자암 김구는 기묘사화로 임피에 유배(1531-1533)되어 임피현에 명현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봉암서원에 배향되었다그 후 고용집 등은 1724(경종4)에 창강(滄江조속(趙涑, 1595-1668)을 봉암서원에 추배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봉암서원은 1695(숙종21)에 사액 되었다가 1868(고종5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봉암서원 창건 및 사액 관련 유림

군산시사 유학편에는 봉암서원 창건 및 사액을 추진했던 군산지역 유림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산두(1585-1669)

자는 능가(能可호는 매촌(梅村), 본관은 평산충정공 송헌의 후손으로 사정 유()의 아들이다우암선생의 문인으로 누차 향도천을 받았다임피정읍의 유림들과 협력하여 봉암서원과 고암서원(古巖書院)을 창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학문을 숭상하고 존현의 정신이 투철하였다.

 

조산후

자는 이열(而悅), 호는 봉헌본관은 평산충정공 송헌의 후손으로 수()의 아들이다우암의 문인으로 호학하여 성리지서(性理之書)를 연마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후진들의 교육에도 전력하였으며 덕행이 있었다봉암서원 창건에도 매촌과 같이 힘썼다.

 

황유직

본관은 우주문숙공 거중의 후손으로 익()의 아들이다자는 숙청(淑淸), 호는 송헌(松軒). 봉암서원 창건 때 공이 많아 당시의 원장인 우암이 그를 원장으로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임천(林泉)에서 소요자적 하면서 노후를 보냈다.

 

고용집(1672현종 13- 1735영조 11)

본관은 제주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문충공 경의 후손이다사직 인충의 9세손이고 필()의 아들이다효우심이 강하고 문장이 출중하였다또 존현심이 강하여 임피의 사우들과 함께 김집 선생을 모신 봉암서원에 사액할 것과 정읍에 송시열 사당을 창건할 것을 소청하였다.

 

고위(高偉)

본관은 제주자는 자관호는 죽산이며 문충공 경의 후손이다.

숙종 때는 봉암고암의 두 서원에 사액할 것을 소청하여 바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봉암서원 관련 죽봉시문집

고용집은 그의 책 죽봉시문집에서 봉암서원과 관련하여 다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그의 작품을 통하여 봉암서원의 현인을 존경하고 덕을 숭상하는 죽봉의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

봉암서원서에서는 봉암서원에 배향된 신독재 김집과 자암 김구의 도학의 연원을 그리고 조정에 사액을 청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들은 사계 김장생의 근원이고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덕행을 이었으니 삶에서는 종장(宗匠)이요 국가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했다.

 

상소문()

신독재 선생의 봉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갑술년 10, 1694)인 신독재선생봉암서원청액소(愼獨齋先生鳳巖書院請額疏)’가 있다.

 

봉암서원개기제문(鳳巖書院開基祭文)

봉암서원개기제문은 봉암서원에 터를 닦으며 신명의 가호를 기원한 제문이다.

 

봉암서원중수상량문(鳳巖書院重修上樑文)

봉암서원중수상량문은 죽봉이 봉암서원 중수 때 상량을 축복하는 글이다.

 

봉암서원(鳳巖書院)의 복원과 후세교육 활용

봉암서원은 군산시 임피면 미원리 "서원마을"에 있었던 김집과 김구를 배향한 조선시대 서원이었다.  봉암서원은 현재 훼철된 서원으로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마을 이름은 봉암서원과 밀접한 관련성이 나타나 있다.

봉암서원은 군산지역에서 건립된 6개의 서원 중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이 지역 사림과 유학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그 항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봉암서원은 1660년 창건되었고 1664년 신독재 김집이 배향되었으며 1666년에 자암(自庵김구(金絿, 1488-1534)가 배향되어 1695(인조 13)에 봉암이라고 사액(賜額)을 받은 서원이다.

면암 최익현이 묘비에서 죽봉은 고을선비들과 더불어 봉암서원 사액을 청하고 정읍현에 우암 송선생 사당을 창건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듯이 죽봉과 유서가 깊었던 봉암서원은 복원되어야 한다.

또 사적(史蹟)에 관한 연구와 후세교육 장소로 활용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25여 년전 1992년 4월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 고형곤 박사는 염의원(廉義院)에서 발행한 염의원지 삼수판(廉義院誌三修版)에서 삼수 원지발간(三修院誌發刊)에 즈음하야 ----- 우리 염의서원에도 강당이 있으니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학생들을 모아서 한문공부를 시키고 또 국어와 국사를 담당하는 교수들에게 경서와 사적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는 세미나의 장소로 이용하게 하여 서원 본래의 뜻을 부흥시키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라는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철학자는 현존하는 서원을 활용하여 유림들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젊은 후세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하셨다.

군산의 역사적인 최고(最古봉암사원이 하루 빨리 복원되어 사원의 본래기능이 되길 기대한다임피지역이 배출한 고형곤 박사의 메시지처럼 방학기간을 이용해서 학생들 한문공부를 시키고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며 향토사학자들이 경서와 사적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는 세미나의 장소로 이용하게 되기를 바란다.

군산지역 최고(最古봉암서원의 복원을 통해 서원의 본래의 뜻을 현대적으로 활용하여 군산지역 전통문화가 활성화 되기를 제안한다.

                                                                                                                               (사)군산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최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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