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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월명산 전망대 생각해 봅시다.
군산 시민들은 시민 정신이 월명산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 시민이 많습니다. 월명산 북쪽으로는 아름다운 금강과 남쪽으로는 새만금의 중심 강인 만경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서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월명산은 시내 안쪽으로는 해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숲 속에는 벚나무와 동백나무가 어울어져 경관이 수렴하여 시민들에게 산책하기 좋은 도심 속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군산 출신인 작곡가 박판길 선생님의 가곡 "산노을"이 주는 인문 학적 배경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군산시는 아름다운 월명산에 20m의 전망대를 몇 년 전부터 준비하여 시행하고 있어 몇 가지를 주문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월명산 전망대가 21세기 군산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시와 차별성 있고 독창적이며 기억에 남는 형태로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문화와 역사와의 연계성이 시민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고 관광객들이 한 번 더 찾아올 수 있는 요소여야 합니다. 어디서 본 듯한 디자인으로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월명산의 부드러운 산세를 고려하여 전망대의 형태는 수직인 것보다는 월명산과 어울러지는 곡선적인 형태가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전망대 부지는 월명산 정상에 있으므로 높지 않아도 조망권이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높이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제일 아래층에는 시민들이 쉴 수 있는 휴게 공간과 군산의 역사관을 마련하여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군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필자가 제시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관 디자인 공모가 1차적으로 이루어진 후, 2차로 실시 설계가 진행되어 시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공감대가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 예로, 미국의 뉴욕의 Vessel 전망대가 2천6백억을 들여 벌집 모양으로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열었지만 현재는 문을 닫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실패한 결과입니다. 우리도 이러한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고 공개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전망대 계획 단계에서 외관 디자인과 설계가 공정에 90% 이상 차지하고 성공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군산의 월명산 수시탑이 55년 만에 새롭게 건립되는 전망대가 랜드마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욱 면밀히 검증하고 시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 상징적 랜드마크는 단순한 구조물이나 관광장소가 아닌 경제적 파급효과뿐만 아니라 군산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군산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추억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기고: 강용면 (조각가,설치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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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의회 의장, 군산과 김제간 분쟁과 분열의 벽을 넘어 통합과 상생 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
흔히들 하는 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다. 물건을 훔치려 남의 집에 들어간 도둑이 주인에게 들켜 이웃 사람들이 몰려드니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도둑을 잡아라”하며 피해자인 척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마치 새만금 관할권에 대한 이 모든 분란이 군산에서 비롯된 것처럼 적반하장을 부리고 있는 김제의 모양새다. 최근 김제는 시민을 모욕했다, 원색적인 언론보도를 일삼는다, 군산이 새만금을 독차지하겠다는 야욕의 이빨을 드러낸다는 등 연일 군산시의회 의장인 본 필자와 함께 군산을 맹비난하고 있다. 김제는 더 이상 군산 뒤에 숨어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가 종이 지자체라는 둥, 새만금 공동발전 절대 없다는 둥의 핑계를 대지 말고, 군산 때문에 못 한다는 새만금과 전북도의 공동발전, 상생대로의 방안을 명확히 제시해주길 바란다. 군산은 김제가 관할권에 대해 건건이 쟁송을 하는 행태를 멈추고 올바른 대안과 상호협력 방안을 적극 모색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던 군산이 왜 갑자기 올해 초부터 군산새만금신항 관할권에 대해 사생을 걸었을까? 지난해 12월 전라북도가 추진한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에서 김제가 새만금 관할권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 발단이다. 뜬금없는 ‘선 관할권, 후 행정구역’ 주장이 새만금을 공동과제로 한 3개 시·군 상생 방안에 찬물을 끼얹게 된 것이다. 이게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의 첫 단추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구성에 기대를 해왔던 군산은, 전라북도 내 다른 시군이 어떻게 되던 말던 내 땅이나 찾고 보자는 김제의 주도면밀한 계략에 무척이나 안일한 대응을 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뿐인가? 김제는 그동안 새만금 관할권에 대해서 법과 원칙에 따르자는 양머리를 내어놓고 뒤에서는 온갖 정치적 쟁점과 법적 분쟁으로 내세우는 등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보여왔다. 작년 지방선거 때도 김제는 모 시장 후보자 출마선언 과정에서 새만금 신항만을 김제로 귀속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올해 2월에는 새만금 신항의 정식명칭을 ‘김제항’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5분 자유발언이 나왔으며, 동서도로·만경7공구 등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야금야금 관할권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군산새만금신항 방파제 또한 당연히 군산시 관할인 것을, 김제의 어깃장에 해양수산부에서 관할권 결정을 신청 중이다.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쟁송을 제기하는 게 김제에서 말하는 법과 원칙에 따른 행정이라는 말인가? 당장 중분위 결정을 앞두고 있고 현재 군산시 행정구역인 군산새만금신항만은 물론 두리도, 비안도마저도 빼앗기게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군산시민을 우습게 보는 행태다. 과거 1·2호 방조제에 이어 또다시 역사적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아 시민들에게 실태를 알리고 함께 울분을 토로하며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자는 몸부림이 제정신이 아닌 행위이고 야망과 야욕을 드러내는 모습이라는 말인가? 더군다나 도가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 때마다 김제 서부지역과 현재의 군산지역이 고려시대 임피현에 포함된다며 김제와 군산은 역사적 뿌리가 같다며 동질성을 강조하는데 오히려 김제는 고군산군도가 만경현이었다며 새만금 관할권 주장을 하는, 이 아전인수격인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가만두고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새만금 역사의 한 자락에 서 있는 군산시의회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3·1만세 운동 때 항거한 것처럼, 우리 군산시민들은 새만금 관할권이 중심을 잃으면 안 된다고 전라북도에 외쳐대는 것이다. 이것이 군산시민으로서, 전라북도민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지방소멸위험 지수 분석 결과 전라북도 13개 시군이 ‘소멸위험 지역’, 이 중 7개 군은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전라북도가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군산새만금신항이 군산항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군산항은 사라지고, 전라북도 유일의 항구도시인 군산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전라북도 중추도시 중 하나인 군산이 소멸된다면 전라북도의 미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도에서도 나서야한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를 추진함에 앞서 각자도생격인 새만금 관할권 주장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고 공존공생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3개 시군 간 상생, 나아가 전북의 생존을 위해서는 분쟁과 분열을 제대로 봉합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한 후 통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전라북도가 새만금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경제도시로 나아갈 수 있다. 김제도 알고 있지 않은가? 2호 방조제, 새만금 동서도로 및 신항만이 새만금 개발의 핵심인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단지 면적만 따져 군산이 새만금을 다 차지하려 한다고 전라북도민마저 호도시키지 말길 바란다. 김제가 관할권에 더 이상 법적 쟁송을 제기하지 않고 새만금 김제·군산·부안 통합추진위원회 발족에 김제가 갈등을 조장하는 행위라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일이 없다면 군산시민은 전라북도 발전에 얼마든 협조할 각오가 되어 있다. 본 필자에 대한 비방을 가득 담은 김제시의회의 입장을 되새기니 김제가 이웃도시와 전라북도의 상생발전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의지를 고수하여 지금이라도 서로가 새만금에 대해 정치적 이해관계 및 법적 분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도가 중심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우리 군산시민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대승적 차원에서 전북의 백년대계를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서로 손을 맞잡아 희망과 기회의 땅, 새만금의 새 역사를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기에. -본 내용은 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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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월명산 전망대 생각해 봅시다.
- 군산 시민들은 시민 정신이 월명산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 시민이 많습니다. 월명산 북쪽으로는 아름다운 금강과 남쪽으로는 새만금의 중심 강인 만경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서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월명산은 시내 안쪽으로는 해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숲 속에는 벚나무와 동백나무가 어울어져 경관이 수렴하여 시민들에게 산책하기 좋은 도심 속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군산 출신인 작곡가 박판길 선생님의 가곡 "산노을"이 주는 인문 학적 배경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군산시는 아름다운 월명산에 20m의 전망대를 몇 년 전부터 준비하여 시행하고 있어 몇 가지를 주문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월명산 전망대가 21세기 군산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시와 차별성 있고 독창적이며 기억에 남는 형태로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문화와 역사와의 연계성이 시민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고 관광객들이 한 번 더 찾아올 수 있는 요소여야 합니다. 어디서 본 듯한 디자인으로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월명산의 부드러운 산세를 고려하여 전망대의 형태는 수직인 것보다는 월명산과 어울러지는 곡선적인 형태가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전망대 부지는 월명산 정상에 있으므로 높지 않아도 조망권이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높이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제일 아래층에는 시민들이 쉴 수 있는 휴게 공간과 군산의 역사관을 마련하여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군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필자가 제시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관 디자인 공모가 1차적으로 이루어진 후, 2차로 실시 설계가 진행되어 시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공감대가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 예로, 미국의 뉴욕의 Vessel 전망대가 2천6백억을 들여 벌집 모양으로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열었지만 현재는 문을 닫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실패한 결과입니다. 우리도 이러한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고 공개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전망대 계획 단계에서 외관 디자인과 설계가 공정에 90% 이상 차지하고 성공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군산의 월명산 수시탑이 55년 만에 새롭게 건립되는 전망대가 랜드마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욱 면밀히 검증하고 시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 상징적 랜드마크는 단순한 구조물이나 관광장소가 아닌 경제적 파급효과뿐만 아니라 군산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군산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추억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기고: 강용면 (조각가,설치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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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의회 의장, 군산과 김제간 분쟁과 분열의 벽을 넘어 통합과 상생 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
- 흔히들 하는 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다. 물건을 훔치려 남의 집에 들어간 도둑이 주인에게 들켜 이웃 사람들이 몰려드니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도둑을 잡아라”하며 피해자인 척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마치 새만금 관할권에 대한 이 모든 분란이 군산에서 비롯된 것처럼 적반하장을 부리고 있는 김제의 모양새다. 최근 김제는 시민을 모욕했다, 원색적인 언론보도를 일삼는다, 군산이 새만금을 독차지하겠다는 야욕의 이빨을 드러낸다는 등 연일 군산시의회 의장인 본 필자와 함께 군산을 맹비난하고 있다. 김제는 더 이상 군산 뒤에 숨어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가 종이 지자체라는 둥, 새만금 공동발전 절대 없다는 둥의 핑계를 대지 말고, 군산 때문에 못 한다는 새만금과 전북도의 공동발전, 상생대로의 방안을 명확히 제시해주길 바란다. 군산은 김제가 관할권에 대해 건건이 쟁송을 하는 행태를 멈추고 올바른 대안과 상호협력 방안을 적극 모색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던 군산이 왜 갑자기 올해 초부터 군산새만금신항 관할권에 대해 사생을 걸었을까? 지난해 12월 전라북도가 추진한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에서 김제가 새만금 관할권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 발단이다. 뜬금없는 ‘선 관할권, 후 행정구역’ 주장이 새만금을 공동과제로 한 3개 시·군 상생 방안에 찬물을 끼얹게 된 것이다. 이게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의 첫 단추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구성에 기대를 해왔던 군산은, 전라북도 내 다른 시군이 어떻게 되던 말던 내 땅이나 찾고 보자는 김제의 주도면밀한 계략에 무척이나 안일한 대응을 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뿐인가? 김제는 그동안 새만금 관할권에 대해서 법과 원칙에 따르자는 양머리를 내어놓고 뒤에서는 온갖 정치적 쟁점과 법적 분쟁으로 내세우는 등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보여왔다. 작년 지방선거 때도 김제는 모 시장 후보자 출마선언 과정에서 새만금 신항만을 김제로 귀속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올해 2월에는 새만금 신항의 정식명칭을 ‘김제항’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5분 자유발언이 나왔으며, 동서도로·만경7공구 등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야금야금 관할권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군산새만금신항 방파제 또한 당연히 군산시 관할인 것을, 김제의 어깃장에 해양수산부에서 관할권 결정을 신청 중이다.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쟁송을 제기하는 게 김제에서 말하는 법과 원칙에 따른 행정이라는 말인가? 당장 중분위 결정을 앞두고 있고 현재 군산시 행정구역인 군산새만금신항만은 물론 두리도, 비안도마저도 빼앗기게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군산시민을 우습게 보는 행태다. 과거 1·2호 방조제에 이어 또다시 역사적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아 시민들에게 실태를 알리고 함께 울분을 토로하며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자는 몸부림이 제정신이 아닌 행위이고 야망과 야욕을 드러내는 모습이라는 말인가? 더군다나 도가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 때마다 김제 서부지역과 현재의 군산지역이 고려시대 임피현에 포함된다며 김제와 군산은 역사적 뿌리가 같다며 동질성을 강조하는데 오히려 김제는 고군산군도가 만경현이었다며 새만금 관할권 주장을 하는, 이 아전인수격인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가만두고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새만금 역사의 한 자락에 서 있는 군산시의회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3·1만세 운동 때 항거한 것처럼, 우리 군산시민들은 새만금 관할권이 중심을 잃으면 안 된다고 전라북도에 외쳐대는 것이다. 이것이 군산시민으로서, 전라북도민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지방소멸위험 지수 분석 결과 전라북도 13개 시군이 ‘소멸위험 지역’, 이 중 7개 군은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전라북도가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군산새만금신항이 군산항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군산항은 사라지고, 전라북도 유일의 항구도시인 군산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전라북도 중추도시 중 하나인 군산이 소멸된다면 전라북도의 미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도에서도 나서야한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를 추진함에 앞서 각자도생격인 새만금 관할권 주장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고 공존공생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3개 시군 간 상생, 나아가 전북의 생존을 위해서는 분쟁과 분열을 제대로 봉합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한 후 통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전라북도가 새만금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경제도시로 나아갈 수 있다. 김제도 알고 있지 않은가? 2호 방조제, 새만금 동서도로 및 신항만이 새만금 개발의 핵심인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단지 면적만 따져 군산이 새만금을 다 차지하려 한다고 전라북도민마저 호도시키지 말길 바란다. 김제가 관할권에 더 이상 법적 쟁송을 제기하지 않고 새만금 김제·군산·부안 통합추진위원회 발족에 김제가 갈등을 조장하는 행위라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일이 없다면 군산시민은 전라북도 발전에 얼마든 협조할 각오가 되어 있다. 본 필자에 대한 비방을 가득 담은 김제시의회의 입장을 되새기니 김제가 이웃도시와 전라북도의 상생발전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의지를 고수하여 지금이라도 서로가 새만금에 대해 정치적 이해관계 및 법적 분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도가 중심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우리 군산시민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대승적 차원에서 전북의 백년대계를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서로 손을 맞잡아 희망과 기회의 땅, 새만금의 새 역사를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기에. -본 내용은 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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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월명산 전망대 생각해 봅시다.
- 군산 시민들은 시민 정신이 월명산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 시민이 많습니다. 월명산 북쪽으로는 아름다운 금강과 남쪽으로는 새만금의 중심 강인 만경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서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월명산은 시내 안쪽으로는 해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숲 속에는 벚나무와 동백나무가 어울어져 경관이 수렴하여 시민들에게 산책하기 좋은 도심 속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군산 출신인 작곡가 박판길 선생님의 가곡 "산노을"이 주는 인문 학적 배경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군산시는 아름다운 월명산에 20m의 전망대를 몇 년 전부터 준비하여 시행하고 있어 몇 가지를 주문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월명산 전망대가 21세기 군산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시와 차별성 있고 독창적이며 기억에 남는 형태로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문화와 역사와의 연계성이 시민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고 관광객들이 한 번 더 찾아올 수 있는 요소여야 합니다. 어디서 본 듯한 디자인으로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월명산의 부드러운 산세를 고려하여 전망대의 형태는 수직인 것보다는 월명산과 어울러지는 곡선적인 형태가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전망대 부지는 월명산 정상에 있으므로 높지 않아도 조망권이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높이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제일 아래층에는 시민들이 쉴 수 있는 휴게 공간과 군산의 역사관을 마련하여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군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필자가 제시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관 디자인 공모가 1차적으로 이루어진 후, 2차로 실시 설계가 진행되어 시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를 통해 공감대가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 예로, 미국의 뉴욕의 Vessel 전망대가 2천6백억을 들여 벌집 모양으로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열었지만 현재는 문을 닫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실패한 결과입니다. 우리도 이러한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고 공개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전망대 계획 단계에서 외관 디자인과 설계가 공정에 90% 이상 차지하고 성공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군산의 월명산 수시탑이 55년 만에 새롭게 건립되는 전망대가 랜드마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욱 면밀히 검증하고 시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 상징적 랜드마크는 단순한 구조물이나 관광장소가 아닌 경제적 파급효과뿐만 아니라 군산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군산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추억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기고: 강용면 (조각가,설치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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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의회 의장, 군산과 김제간 분쟁과 분열의 벽을 넘어 통합과 상생 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
- 흔히들 하는 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다. 물건을 훔치려 남의 집에 들어간 도둑이 주인에게 들켜 이웃 사람들이 몰려드니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도둑을 잡아라”하며 피해자인 척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마치 새만금 관할권에 대한 이 모든 분란이 군산에서 비롯된 것처럼 적반하장을 부리고 있는 김제의 모양새다. 최근 김제는 시민을 모욕했다, 원색적인 언론보도를 일삼는다, 군산이 새만금을 독차지하겠다는 야욕의 이빨을 드러낸다는 등 연일 군산시의회 의장인 본 필자와 함께 군산을 맹비난하고 있다. 김제는 더 이상 군산 뒤에 숨어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가 종이 지자체라는 둥, 새만금 공동발전 절대 없다는 둥의 핑계를 대지 말고, 군산 때문에 못 한다는 새만금과 전북도의 공동발전, 상생대로의 방안을 명확히 제시해주길 바란다. 군산은 김제가 관할권에 대해 건건이 쟁송을 하는 행태를 멈추고 올바른 대안과 상호협력 방안을 적극 모색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던 군산이 왜 갑자기 올해 초부터 군산새만금신항 관할권에 대해 사생을 걸었을까? 지난해 12월 전라북도가 추진한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에서 김제가 새만금 관할권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 발단이다. 뜬금없는 ‘선 관할권, 후 행정구역’ 주장이 새만금을 공동과제로 한 3개 시·군 상생 방안에 찬물을 끼얹게 된 것이다. 이게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의 첫 단추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구성에 기대를 해왔던 군산은, 전라북도 내 다른 시군이 어떻게 되던 말던 내 땅이나 찾고 보자는 김제의 주도면밀한 계략에 무척이나 안일한 대응을 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뿐인가? 김제는 그동안 새만금 관할권에 대해서 법과 원칙에 따르자는 양머리를 내어놓고 뒤에서는 온갖 정치적 쟁점과 법적 분쟁으로 내세우는 등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보여왔다. 작년 지방선거 때도 김제는 모 시장 후보자 출마선언 과정에서 새만금 신항만을 김제로 귀속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올해 2월에는 새만금 신항의 정식명칭을 ‘김제항’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5분 자유발언이 나왔으며, 동서도로·만경7공구 등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야금야금 관할권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군산새만금신항 방파제 또한 당연히 군산시 관할인 것을, 김제의 어깃장에 해양수산부에서 관할권 결정을 신청 중이다. 매립지가 생길 때마다 쟁송을 제기하는 게 김제에서 말하는 법과 원칙에 따른 행정이라는 말인가? 당장 중분위 결정을 앞두고 있고 현재 군산시 행정구역인 군산새만금신항만은 물론 두리도, 비안도마저도 빼앗기게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군산시민을 우습게 보는 행태다. 과거 1·2호 방조제에 이어 또다시 역사적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아 시민들에게 실태를 알리고 함께 울분을 토로하며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자는 몸부림이 제정신이 아닌 행위이고 야망과 야욕을 드러내는 모습이라는 말인가? 더군다나 도가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 설명회 때마다 김제 서부지역과 현재의 군산지역이 고려시대 임피현에 포함된다며 김제와 군산은 역사적 뿌리가 같다며 동질성을 강조하는데 오히려 김제는 고군산군도가 만경현이었다며 새만금 관할권 주장을 하는, 이 아전인수격인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가만두고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새만금 역사의 한 자락에 서 있는 군산시의회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3·1만세 운동 때 항거한 것처럼, 우리 군산시민들은 새만금 관할권이 중심을 잃으면 안 된다고 전라북도에 외쳐대는 것이다. 이것이 군산시민으로서, 전라북도민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지방소멸위험 지수 분석 결과 전라북도 13개 시군이 ‘소멸위험 지역’, 이 중 7개 군은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전라북도가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군산새만금신항이 군산항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군산항은 사라지고, 전라북도 유일의 항구도시인 군산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전라북도 중추도시 중 하나인 군산이 소멸된다면 전라북도의 미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도에서도 나서야한다. 새만금 특별지방자치단체를 추진함에 앞서 각자도생격인 새만금 관할권 주장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고 공존공생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3개 시군 간 상생, 나아가 전북의 생존을 위해서는 분쟁과 분열을 제대로 봉합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한 후 통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전라북도가 새만금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경제도시로 나아갈 수 있다. 김제도 알고 있지 않은가? 2호 방조제, 새만금 동서도로 및 신항만이 새만금 개발의 핵심인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단지 면적만 따져 군산이 새만금을 다 차지하려 한다고 전라북도민마저 호도시키지 말길 바란다. 김제가 관할권에 더 이상 법적 쟁송을 제기하지 않고 새만금 김제·군산·부안 통합추진위원회 발족에 김제가 갈등을 조장하는 행위라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일이 없다면 군산시민은 전라북도 발전에 얼마든 협조할 각오가 되어 있다. 본 필자에 대한 비방을 가득 담은 김제시의회의 입장을 되새기니 김제가 이웃도시와 전라북도의 상생발전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의지를 고수하여 지금이라도 서로가 새만금에 대해 정치적 이해관계 및 법적 분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도가 중심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우리 군산시민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대승적 차원에서 전북의 백년대계를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서로 손을 맞잡아 희망과 기회의 땅, 새만금의 새 역사를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기에. -본 내용은 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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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의회 의장, 군산과 김제간 분쟁과 분열의 벽을 넘어 통합과 상생 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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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화백 '예수의 생애' 구암동에서 완성
- 수태 고지 예수탄생 세례받음 제자들을 부름 간음한 여인 물위를 걷다 오천명을 먹임 막달레나 예수의 발을 씻김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 최후의 만찬 빌라도에게 재판을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 못박힘 예수님 운구 부활 승천 운보 김기창 화백과 성화 〈예수의 생애〉 군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최규홍 운보 김기창(1913-2001)은 서울 운니동에서 출생했다. 승동보통학교에 입학 등교 첫 날 열린 대운동회때 장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인해 후천성 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졸업후 어머니 한윤명의 권유로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서 미술수업을 시작했다. 1931년(18세)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로 첫 입선, 어머니는 아호를 운포(雲圃)라 지어주었다. 그는 광복과 함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아호 운포(雲圃)의 구(口)를 없애고 운보(雲甫)로 바꾸었다. 19세에 〈수조(水鳥)〉로 제11회 선전에 입선했으나 어머니가 급서(향년 38세)했다. 여일(麗日)로 제19회 선전 특선, 연 4회 특선으로 선전 규정에 의해 27세에 추천작가가 되었다. 부인 우향 박래향은 1920년 4월 13일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6세때 부모를 따라 전북 군산으로 이주했다. 군산공립보통학교,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 사범대에 입학했고, 그 다음해에 인물화에 능한 동양화가 에구치(江口敬郞)를 만나서 수채화와 동양화에 대해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1944년 도쿄여자미술대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한 우향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최고상 '창덕궁상', 1956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노점’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여류작가로서는 최정상의 위치를 점했다. 운보는 1943년(33세)에 우향과 첫 만남을 가졌고, 1948년 1월 27일 개관을 준비하고 있던 중구 예장동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947년 12월 17일 우향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관장이던 송석하의 주례로 신식과 구식이 어우러진 형식을 취했다. 운보는 친구 이강수에게, 우향은 이모에게 병풍 한 벌씩을 갖다 주고 비용을 마련했다. 우향 모친은 완강한 반대를 했고 부친은 병으로 참석치 못했다. 자유신문(1947.12.13.자)은 “〈김기창 화백 결혼〉-우리 화단의 중진인 김기창 화백은 오는 17일 오후 1시 민속박물관내에서 송석하 씨 주례로 여류화가 박래현 양과 화촉의 성곡(盛曲)을 거행하다.”라고 보도했다. 1947년 결혼 당시 우향과의 약속 중 하나였던 부부전을 개최키로 하고 한국 최초의 부부전인 〈운보-우향부부전〉을 개최,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성격의 개성적 경향에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1950년 6월 22일 제4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 중 3일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 작품을 분실하게 되었다. 피난을 가지 못해 공산 치하에서 3개월을 보냈다. 장애자라는 이유로 납북은 모면하게 되었으나 여동생 기옥(基玉), 남동생 기만(基萬)이 납북되고 말았다. 운보는 당시 전시회에 심혈을 기울였던 터라 경제적 여력이 없게 되어 1950년 처가가 있는 군산 시외의 농촌 구암동으로 내려와 농장 한 모퉁이의 토방에 살게 되었다. 운보는 피난생활의 생활고로 미군부대의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김종래의 소개로 초상화를 그려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평소 우향을 통해 친분이 있던 미군정 당시 서울시장을 지낸 바 있는 김형민이 부산에 있으면서 지원해 주어서 10여 점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그림을 판 돈으로 구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일본에서 회견과 안료, 붓, 먹 등을 조달하여 미군부대의 초상화 그리는 생활을 중단하고 다시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 때 김형민이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찍어둔 사진 30여 장을 제공하여 운보가 이를 참조하여 풍속화를 재현하기도 하였다. 2015년에 발행된 〈운보 김기창 성화집〉에 따르면 운보는 1952년 1여 년에 걸쳐 〈예수의 생애〉 제작에 착수했다. 1년 동안 수태고지. 아기예수의 탄생, 동방박사의 경배 등 29점의 예수의 일대기 완성에 몰두했다. 1953년 독일 선교사의 제의로 〈부활〉을 추가로 제작하여 〈예수의 생애〉 총 30점을 완성했다. 1953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구암동 시절 그린 성화 30점, 입체파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제5회 운보-우향부부전을 10여 일간 개최하여 성화를 보려는 서울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매일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운보는 1978년에 발행된 ‘나의 심혼(心魂)을 바친 갓 쓴 예수의 일대기’ 성화집 〈예수의 생애〉를 출간하고 기념으로 경미화랑에서 〈예수의 생애〉 시리즈를 전시하며 다음과 같이 심경을 밝혔다. “그것은 마음 괴로운 순간이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었다. 이 무렵 나는 예수의 행적을 더듬는 성화를 그리고 있었다. 때는 6.25 전쟁의 가열로 온 민족이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냈던 1952년 전북 군산의 피난처였다. 나는 처가에서 나의 고통스런 생활을 화필로 달래며 어서 이 땅에서 전쟁이 끝나고 통일된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다. 그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를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갖기 위해 한 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한편 운보 역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친일행적을 엿볼 수 있다. 1993년 7월 2일자 한겨레신문은 「원로 동양화가인 운보 김기창(80) 화백은 1일 외아들 김완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과 관련해 “일제 말에 친일을 한 사실이 있으며 이에 대해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한다”고 밝혔다. 김완은 이날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기자회견을 갖고 친일행위를 회개하는 뜻에서 오는 10월 5권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작도록에 친일작품인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총후병사’ 등을 수록하는 한편 과거에 대한 고해성사 형식의 글도 실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친일 논란을 불러 일으킨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1943년 1월 29일부터 9일까지 매일신보에 친일 시와 함께 실린 7점의 삽화 가운데 하나다.」 라고 보도했다. 그 역시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고 조선총독부 전시체제와 문예정책에 협조했던 오점이 있었다. 친일미술가조직 구신회에 참여하거나(1941), 조선남화연맹 전시회(1942), 반도총후미술전람회(1942,1943), 결전미술전람회(1944) 등 일본화 부문에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출품했다. 매일신보에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의 삽화를 그리는 등 친일행위에 적극 가담했다.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을 계기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발간위원회’가 작품 4천여점으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전5권)을 발간했다. 전작도록이 발간된 것은 그가 국내 최초라고 한다. 1995년 8월(81세) 운보는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의 막내 동생 기만과 형제전을 관훈동 도올아트타운 신관에서 열었다. 15년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 기만은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으로 가 평양예술대를 졸업했으며 공훈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말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는 월북했던 동생 기만을 극적으로 만나 가슴 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2001년 1월 23일 운보는 숙환으로 운명하여 청주 운보의 집에 우향과 합장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들 완(完), 딸 현(玄), 선(璇), 수녀가 된 영(瑛 )등 1남 3녀다. 북한에는 여동생 기옥(基玉, 의사), 남동생 기만(基萬, 공훈화가)이 있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막내딸 영을 잉태했을 때 영감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1957년작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기증했다. 구암동 390번지의 구 토지대장에서 1952년 10월에 운보 자신의 명의로 소유권 이전 등기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운보가 그의 처 우향, 아들 완, 큰딸 현을 이끌고 군산에 피난 와 구암동 390번지의 대지(대지 251㎡)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했던 흔적이다. 현재 운보 가족이 살았던 구암동 390번지는 건물은 사라지고 빈 터로 남아 있다. 70여 년전 운보가 이곳의 헛간을 작업실로 개조해 30여점의 성화를 그렸던 향토사적으로 스토리텔링이 있는 곳이다. 개발에 밀려 운보와 우향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문화 골목’을 보존하고 〈작은 영상 미술관〉을 조성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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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홍 교수의 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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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화백 '예수의 생애' 구암동에서 완성